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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한겨레]도시는‘사회주의’를 필요로 한다
- 관리자
- 조회 : 6287
- 등록일 : 2010-02-25
[시민편집인의눈] 도시는 ‘사회주의’를 필요로 한다 | |
이 대통령을 ‘좌빨’로 모는 권태신 실장의 논리적 모순 국토정책의 퇴행적 보수편향에 ‘변혁의 논리’로 맞서야 한국 사회에서 논쟁이 갈 데까지 가면 색깔론이 나온다. ‘좌빨’이니 ‘수구골통’이라는 말이 금방 튀어나오는 인터넷의 ‘댓글문화’에 견주어 시간과 용어 선택의 차이가 있을 뿐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다. “세종시 원안대로 하면 사회주의 도시가 된다”는 권태신 국무총리실장의 발언은 한 사례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의 정책 논쟁은 ‘국가 백년대계’니 ‘공익’이니 하면서 진지하게 진행되는 듯하지만, 실은 그 배경에 철저한 사익 추구 또는 정치적 계산이 도사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선거 막바지에 급조된 신행정수도 공약을 내놓은 거나,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수도권 정당론’이 나온 것은 비슷한 맥락이다. 지난달에 이어 세종시 문제를 또 언급하려는 것은 그 이슈를 둘러싼 논의의 허상을 한 꺼풀 더 벗겨내고 논점의 핵심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하나다. 세종시를 둘러싼 극한대립은 불균형 성장과 균형 발전, 권한의 중앙집중과 지방분산 등 거시적 정책목표뿐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토지소유 관념과 국토와 도시공간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보수와 진보언론은 그런 본질적인 문제 대신 정치권의 힘겨루기나 색깔론으로 다루는 데 익숙하다. <한겨레>로 좁혀 사례를 든다면, 2월 임시국회의 대정부 질문이 시작된 5일치 신문에는 1면 머리로 ‘세종시 내전 본격화…두쪽 난 한나라’, 5면에 ‘“양치기 대통령”-“박근혜도 말바꿔”’를 내보내고, 사설로 ‘세종시에까지 빨간 색칠을 하려는가’라고 따졌다. 크게 쓸 수 있는 기사이고 사설이다. 그러나 적어도 해설로는 질문과 답변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고, 사설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빨간 색칠을 한다’고 방어만 할 게 아니라, ‘도시는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정면승부를 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런던시장을 지낸 케네스 리빙스턴이 한 것이다. 런던 하면 아직도 교통체증과 자욱한 스모그를 떠올리는 이가 있으리라. 그러나 요즘 런던은 서울보다 교통이 잘 뚫리고 매연이 덜하다. 리빙스턴이 1980년대 대처의 신보수주의 시대부터 ‘미치광이 좌파’(Loony Left) 소리를 들어가며 대중을 도시의 주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온 덕분이다. 그는 시의회 의장 또는 런던시장으로 일하면서 2003년에는 ‘버스-지하철 환승체제’를 갖춰 버스요금을 대폭 내리고, 도심 진입 승용차에는 1만5000원가량의 혼잡통행료를 물렸다. 그 결과 단기적으로 대중교통 이용률은 39%나 증가하고 도심교통량은 20%나 줄었다. 이런 리빙스턴에게 영국의 보수파는 ‘빨갱이 켄’(Red Ken)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루퍼트 머독의 황색지인 <더 선>은 ‘영국에서 가장 혐오스런 사람’으로 지목했다. 하긴 ‘ken’이란 단어에는 ‘시각’ 또는 ‘시야’라는 뜻도 있으니 그가 하는 일마다 ‘빨갱이 시각’으로 보였던 보수파에게는 그 이상 부르기 적합한 별명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런던시민 다수는 그를 지지해 재선에 성공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큰 업적도 ‘청계천 사업’이 아니라 런던을 벤치마킹한 ‘버스중앙차로제’와 ‘환승제도’라고 본다. 사회주의적 도시교통계획 개념이 적용된 것이다. 권태신 총리실장은 결국 이 대통령을 ‘좌빨’로 모는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 인간 자체가 사회적 동물이기에 도시계획은 그런 본성에 부응한다. 제대로 된 도시계획에는 도시라는 공간을 막개발과 자본의 배타적 지배 아래 두지 않고 공공의 영역에 두겠다는 의지가 표출된다. 새도시는 영국에서 개념이 정립될 때부터 사회주의적 커뮤니티를 이상적 도시로 생각했다. 도시는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토박이와 이방인, 건강한 자와 장애인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모둠살이터’다. 용산참사도 용산 역세권에 대한 대자본과 땅주인의 개발욕구, 그리고 영세자본과 세입자들의 생활권 보장 요구가 맞선 싸움에 공권력이 일방적으로 강자 편을 드는 바람에 빚어진 재앙이다. 세종시를 둘러싼 논란 역시 수도권의 기득권 또는 중앙집권 세력과 지방분권 세력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 비효율이 수정안의 이유지만, 사실 노무현 후보의 ‘신행정수도 건설’ 공약이 원안대로 추진돼 대부분 중앙행정부처가 행정수도로 옮겨간다면 비효율은 논란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행정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의 ‘관습’은 서울을 중심으로 고착된 ‘기득권’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마저 통일하지 못한 기원전 396년 얘기지만, 평민들은 로마에서 20㎞쯤 떨어진 베이라는 곳에 제2수도를 건설하자고 제안한다. 귀족들의 본거지인 로마에 정치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한 그들의 권리 신장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온 귀족들의 반대논리가 어처구니없다는 점에서 관습헌법 논리를 닮았다. “로마에는 신들이 살고 있고 신들이 로마를 지켜주었는데 어떻게 신들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제2수도를 만들 수 있겠는가?”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은 이성계의 도읍에서 비롯됐다는데, 실은 그도 “예로부터 역성의 명을 받은 임금은 반드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을 했다. 법조문도 없는 관습법은 개정도 불가능해 수도를 영원히 옮길 수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세계적으로 서울만큼 수도의 지위를 오래 누려온 도시도 드물다. 서울의 지배적 위치는 한국인의 의식구조 속에 깊이 뿌리박아 강원도에서 서울로 내려가도 ‘상경’한다고 말한다. 사람과 권력과 돈이 집중될 뿐 아니라 하다못해 전국의 바위나 소나무까지도 잘생긴 것은 서울로 반출된다. 신행정수도 건설은 대선 석 달 전에 급조됐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선 국면에서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 던져졌기 때문에 더욱 극심한 논란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발표 시기와 방법의 과오가 신행정수도의 타당성마저 저해하는 것은 아니다. 노 대통령이 ‘재미를 좀 봤다’고 말한 것은 가벼운 처신이었지만, 결국 민심을 얻은 것은 그의 정치적 계산이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대의에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일 터이다. 중앙행정 기능은 분산되겠지만 효율의 문제만을 고려하기에는 수도권 과밀의 비용과 비효율이 너무나 큰 상황이다. 진정 행정 비효율이 문제라면 다른 기관이나 청와대도 언젠가 세종시로 옮겨가면 된다. 통일 뒤를 생각할 때 수도가 국토의 너무 남쪽에 치우치게 된다는 지적도 일리는 있지만, 수도가 꼭 국토의 중앙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미국의 수도와 최대 도시가 국토만 놓고 보면 극단적으로 치우친 바닷가에 있어서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도시문제는 결국 계급문제이며, 거대 국책사업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행세한다. 독일의 사회주택 건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카다피의 대수로사업… 어느 것 하나 이념과 관련되지 않은 게 없다. 권력에 의한 공간구조 개편은 대중의 생활공간과 여가공간, 그리고 일터를 파괴하기도 하고, 생활과 노동의 조건을 개선하기도 한다. 진보언론은 보수정권의 움직임을 중계하거나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토·도시정책의 퇴행적 보수 편향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대중이 국토와 도시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국토와 도시공간의 보존 또는 변혁의 논리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적 정론지의 소임이 아닐까?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