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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한겨레] 탐사보도팀 인턴 관련
- 관리자
- 조회 : 6560
- 등록일 : 2011-11-08
한국인 남편이 말한 우리집
바로 19평 비닐 움막이었다 | |
등록 : 20111106 20:35 | 수정 : 20111108 10:41 |
[조선족 대이주 100년 〈1부〉뿌리] ③ 잃어버린 청춘
여태까지 남편은 제 처지를 말하지 않았다. 다섯달 전, 중국 심양(선양) 공항에서 남자를 처음 봤을 때, 박씨의 가슴에는 아무 파동이 일지 않았다. 결혼은 낭만이 아니라 서류에 기초했다. 만나자마자 미혼 증명서, 혼인 신고서, 혼인 관계 증명서를 한국·중국 대사관에 차례로 보냈다. 마지막 단계에서 서류는 말썽을 부렸다. 입국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남편 은행계좌에 잔고가 없다고 한국 대사관이 문제 삼았다. 남편은 문제를 봉합했다. 신용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 계좌에 넣었다. 그 돈을 갚을 능력이 남편에게 없다는 사실을 박씨는 몰랐다. 결혼식은 없었다. 드레스도 한복도 입지 못했다.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내릴 때까지, 앞으로 어찌 살아보자는 따뜻한 말을 남편은 박씨에게 건네지 않았다.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좋아서 하는 결혼이 아니니까.” 남편 친구가 작고 푸른 트럭을 몰고 신혼부부를 마중 나왔다. 2001년 5월 경기도 어느 소도시에 트럭이 멈췄을 때, 박씨는 큰 빌딩을 보았다. 빌딩 건너 채마밭에 뾰족뾰족 솟아나는 어린 상추도 보았다. 박씨의 삶은 빌딩이 아니라 채마밭에 속했다. 주름진 이랑 복판에 19평 비닐 움막이 서 있었다. 검은 부직포가 지붕을 대신하고 얇은 나무 합판이 벽을 대체한 움막 옆에 플라스틱으로 대충 꾸민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그런 데 사람이 산다고 상상도 못했죠.” 상상 못한 일은 더 있었다. 가구공장, 식당, 건설 현장, 가정부의 노동이 박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혼소송과 미혼모의 삶도 다가오고 있었다. 10년 뒤, 35살의 나이에 폐경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박씨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중국을 떠나 한국에 온 조선족은 하층 일용직 노동자로 편입된다. 남자는 건설잡부와 공장 비정규직, 여자는 식당아줌마·가정부·간병인 등으로 일한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사회 최하층 노동을 그들이 담당해 왔고, 그 구조는 항구화될 조짐이다. 김명환 <흑룡강신문> 한국지사장은 “몇몇 돈을 번 조선족이 식당을 운영할 뿐 대부분 막노동과 식당일을 한다”고 말했다. 지난 9월부터 두달여 동안 ‘재한동포연합총회’(회장 김숙자) ‘서울조선족교회’(담임목사 서경석)가 운영하는 2개의 쉼터를 중심으로 40여명의 조선족을 심층면접했다. 그들은 진짜 이름을 드러내길 꺼렸다. 한국 정부와 언론이 권익을 지켜줄 거라 믿지 않았다. 밥·술·차를 나누고 오랫동안 쉼터에서 함께 지냈어도 파란만장한 삶의 속살을 털어놓기까지 그들은 거듭 주저했다.
한국의 봄은 낯설었다. 19평 비닐움막 안에서 봄볕은 투명하지 않고 탁했다. 5월의 대기는 아침저녁으로 차갑게 식어 비닐의 틈을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움막 안에 보일러를 들였지만 박순임(가명·35)씨의 하루하루는 스산했다. 합판으로 방을 나눈 움막 안에서 시어머니는 며느리 몰래 밥과 과일을 혼자 챙겨 먹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건넨 것은 통장과 카드였다. 남편에겐 딱히 정해진 직업이 없었다. 가끔 공사판을 나갔다. 남편은 신용카드 서너장을 돌려막고 있었다. 검은 마그네틱에는 수백만원의 채무가 디지털의 기록으로 새겨져 있었다. 조선족 며느리가 갚아야 할 빚이었다. 박씨의 신혼은 애틋하지 않고 삭막했다. 중국 흑룡강성 시골 마을에 사는 박씨의 부모는 그런 사정을 짐작하지 못했다. 애초부터 사위의 됨됨이를 따진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가야 하는 외동딸의 궁벽한 처지를 늙은 부모는 어쩌지 못했다. 눈웃음이 예쁜 외동딸 박씨는 한족 고중(고등학교)을 졸업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하여 한달에 3000위안(약 54만원)을 받았다. 착실히 돈 버느라 청춘이 가도록 애인이 없었다. 청춘 바쳐 번 돈으로 길림성 연길시에 구멍가게를 냈다. 담배·사탕·과자·술을 팔았다. 담배가게 아가씨는 근처 공사장 인부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연탄아궁이에서 요리를 하여 도시락도 배달했다. 돈을 아끼느라 가게에서 먹고 잤다. 창과 문을 꽁꽁 여미고 누운 자리에서 박씨는 꿈을 꾸었다. 작지만 번듯한 식당을 차려 그 주인이 되는 꿈이었다. 어느 겨울밤, 꿈은 가리가리 찢겼다. 가게 안에 연탄가스가 번졌다. 거품 물고 쓰러진 박씨를 이웃이 발견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근육에 마비가 왔고 피부에 검은 반점이 솟았다. 어머니는 솔잎 가루를 딸에게 먹였다. 반년 뒤 기운을 차렸지만, 사는 일은 죽는 일보다 힘들었다. 병원비를 갚아야 했다. 중국에선 목돈을 만들 수 없었다. 유일한 출구는 바다 건너를 향해 있었다. 바다를 건너려면 한국인과 결혼해야 했다. 고모할머니의 소개로 한국 남자를 만났다. “첫인상은 그저 그랬어요.” 남자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한국인이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한국 들어온 지 한달 만에 박씨는 가구공장에 취직했다. 가구 옮기는 일이 힘에 부쳐 동네 식당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남편을 따라 공사판에 나가 청소도 하고 못질도 했다. 나중엔 가정부 노릇도 했다. 혼자 사는 주인 여자는 토끼를 키웠다. “원래 두 마리였는데 한 마리가 죽었어요. 잘 돌봐주세요.” 서울 소재 어느 대학 음대 교수였다. 외로운 토끼는 넓은 집을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비싼 가구를 갉아먹었다. 교양 있는 여교수는 그런 토끼를 끔찍이 아꼈다. 박씨는 토끼 뒤를 따라다니며 먹이고 살폈다. 하루 5만원을 받았다. (관련설명 가기 ** ) 토끼처럼 외로웠던 박씨는 마음대로 다니지 못했다. 남편은 매일 술에 취해 일 나간 박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서 들어와.” 그 말만 하고 끊었다. 전화는 계속 이어졌다. 비닐움막에 철거 통지서가 날아오고, 반년 동안 모은 돈으로 월세방을 구하고, 날품팔아 번 돈으로 카드빚 수백만원을 갚아도 술에 찌든 남편의 전화는 그치지 않았다. 그 결혼을 통해 남편이 박씨에게 도움을 준 것은 딱 하나였다. 남편의 초청으로 중국에 있던 부모님이 한국에 일하러 나왔다.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몸을 다치고, 어머니도 가정부 일을 힘겨워했다. 나이든 친정 부모는 이내 중국으로 돌아갔다. 서류에 기초한 결혼은 내부에서 무너졌다. 결혼 3년 만에 박씨는 월세방을 뛰쳐나왔다. 남편은 보복했다. 집 나간 박씨의 주민등록을 말소시켰다. 박씨는 잠들지 못했다. 20일 동안 못 잔 일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혼했다. 우울증을 이기려고 친구들과 술도 마셨다. 뜻하지 않게 임신을 헀다. 혼자 중국 친정으로 돌아가 몸을 풀었다. 딸이었다. 결혼한 사촌오빠의 호적에 딸의 이름을 올렸다. 박씨는 다섯달 동안 딸에게 젖을 물렸다. 딸을 위해 돈이 필요했다. 다시 한번 출구는 한국에 있었다. 앙앙 우는 딸을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한국에 들어와 식당일을 시작했다. 박씨의 삶은 낭만이 아니라 서류에 기초했다. 바로잡아야 할 서류가 많았다. 주민등록을 되찾고 한국 국적을 얻고 이혼소송을 끝내고 중국에 있는 딸을 한국에 데려와야 했다. 무료 법률상담소를 찾아다녔다. 서류는 마지막 단계에서 말썽을 부리고 있다. 중국 국적 사촌오빠 호적에 오른 딸을 한국 국적 박씨 호적으로 옮기는 일이 풀리지 않고 있다. 발을 동동 구르는 박씨에게 어느 변호사가 말했다. “그러게 좀 착하게 살지.” 지난 10년 동안 착하지 않게 살았던 순간이 언제인지 박씨는 알지 못한다. 박씨는 서울 강북 어느 부촌에서 월급 200만원짜리 입주 가정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도 이젠 많이 안정됐어요.” 작은 월세방을 구했고, 술 마시는 남편도 사라졌다. 중국에 있는 딸만 데려오면 된다. “한국 학교에 보내 하고픈 일 하면서 행복하게 잘살게 해주고 싶어요.” 살뜰한 연애 한번 못해본 박씨는 재혼할 생각이 없다. 얼마 전부터 생리가 없어졌다. “갱년기가 일찍 왔군요.”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가 말해주었다. 35살에 박씨는 폐경을 맞이했다. “신앙에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박씨는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마다 서울 조선족교회에 나가 찬송한다. 조선족 출신 한국인 박순임씨에겐 죽어 천국 가는 복음만이 위안을 준다. 안수찬 기자, 안세희(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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